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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과 역병은 역사적으로 큰 위기다. 한 나라가 망하기도 하고, 전쟁에서 패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라가 망하는 원인을 딱 한 가지로 속단할 순 없지만, 기근(饑饉, 흉년으로 양식이 모자라 굶주리는 현상)은 명나라를 멸망에 이른 주요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 메르스라는 전염병과 극심한 가뭄으로 큰 위기를 겪기도 했다.
조선시대 후기, 한반도에는 전염성이 강하고 사망률도 높은 병이 창궐했다. 바로 천연두였다. 전염병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는 천연두는 19세기 후반까지 한반도에 남아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당시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던 지석영(1855~1935)은 천연두의 창궐로 한의학의 한계를 몸소 경험했고, 서양에서 실시하고 있는 종두법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 전염병의 제왕, 천연두
천연두(天然痘, smallpox)는 두창(痘瘡), 포창(疱瘡)이라고도 하고 속칭으로 마마(媽媽) 또는 손님이라고도 부른다. 천연두는 19세기 영국 의사인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우두접종법을 발견하기 전까지 대유행을 되풀이하며 많은 사망자를 냈다.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천연두는 고열과 함께 전신에 발진이 나타났다. 조선시대 후기에 만연했던 여러 가지 전염병 중 감염률과 사망률이 가장 높았다. 2주 정도를 버티면 흉터를 남기고 사라지지만 2주를 버티기 힘들었고, 낫더라도 흉한 곰보 자국을 남겼다.
천연두는 인류 최초의 전염병으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적으로 천연두로 3억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천연두가 발생했던 시기를 추정해 보자면,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157년에 사망한 람세스 5세 파라오의 미이라 피부에서 천연두 발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람세스 5세가 살았던 시기에도 천연두가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루이 15세, 스페인의 루이스 1세, 러시아의 페트리아 1세와 같은 한 나라의 군주도 천연두의 위력 앞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16세기 초 에스파냐의 아즈텍 정복 전쟁에서 천연두는 특히 맹위를 떨쳤다. 당시 에스파냐의 군대는 약 600명뿐이었다. 하지만 아즈텍 원주민은 에스파냐 군대보다 30배가 넘었다. 에스파냐 군대는 자신들보다 30배나 많은 아즈텍 원주민을 이길 수가 없었으나, 에스파냐 군대에 섞여 있던 노예로부터 괴질이 퍼졌다. 이 괴질은 순식간에 주변지역을 휩쓸었고, 면역이 없던 아즈텍 원주민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이 괴질은 나중에 천연두로 밝혀졌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당시 1만 명 이상이 천연두로 사망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 세계 31개 국가에서 풍토병으로 남아 있었으나 예방접종을 실시하면서, 마침내 세계보건기구(WHO)는 1980년에 천연두 멸종을 발표했다. 우리나라도 그 이후에는 천연두 예방접종을 권장하지 않았고, 1993년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 우리나라에 우두법을 보급한 지석영
지석영은 우리나라에 우두법을 본격적으로 보급한 인물이다. 가난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지석영은 한의학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아버지 덕분에 한의사인 박영선에게 한학과 의학을 배울 수 있었다. 종두법의 하나인 우두법에 대해 처음 접한 것도 스승인 박영선을 통해서였다. 박영선은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우두종두법에 대한 <종두귀감>이라는 책을 가져와, 이를 토대로 제자들에게 강의했다. 지석영도 그 제자들 중에 한 명이었다. <종두귀감>을 읽고 강의를 들었지만 부족하다고 느낀 지석영은 20일을 걸어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의 한 의원의 군의관이 종두법에 대해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석영의 열정에 감동한 군의관이 약 두 달간 종두법을 가르쳐줬다. 여기서 가져온 두묘(痘苗, 두창에 걸린 소에서 뽑아낸 유백색의 우장(牛漿). 천연두 백신의 원료로 사용 함)와 종두침, 접종 기구를 들고 돌아온 지석영은 자신의 어린 처남에게 첫 종두를 접종했다. 그리고 그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 접종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우두 접종이었다. 결과는 성공이었지만, 부산에서 가져온 두묘는 곧 바닥을 드러냈고,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접종하기 위해서는 두묘 제조기술이 필요했다.
지석영은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하게 됐고, 가서 우두술과 관련된 모든 지식과 기술을 습득해 왔다. 귀국한 후에는 서울에 종두장을 차렸고, 본격적으로 우두접종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천연두가 멸종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지석영은 우두접종을 의무실시 했고, 전라도나 충청도에도 우두국을 설치해 종두법을 가르쳤다.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글 연구에 힘을 쏟기도 했다. 1907년에는 한글 연구를 위해 국문연구소를 설립했다. 하지만, 친일개화정권 당시의 친일 행적은 지석영의 일생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됐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지석영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들어온 일본군의 통역과 길 안내를 도맡기도 했다.
■ 천연두를 몰아내기 위해 지석영만 노력했다?!
지석영은 천연두를 몰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지석영만 그런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천연두의 예방접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지석영이 도입했다는 우두법이 그 중 하나고, 나머지 하나는 인두법이다. 인두법이란 천연두 환자에게서 시료를 얻어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접종해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얻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두법이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인두법에는 환자의 옷을 입거나, 고름이나 딱지를 가루로 만들어 코로 흡입하는 방법 등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가루를 코로 흡입하는 방법을 시행됐다. 하지만, 천연두 환자에게서 시료를 채취하는 방법이 쉽지가 않았다. 오히려 시료를 채취하려는 한의사가 감염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오랜 시간 지나면서 인두법은 노하우가 쌓이게 됐고, 천연두의 예방 접종으로 널리 보급됐다.
정약용은 지석영이 도입했다는 우두법의 존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어렸을 때, 천연두로 어려움을 겪은 바 있기 때문에 종두법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가 직접 우두법을 시행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정약용은 천연두에 관심이 높아 인두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우두법에 대해서도 소개한 인물이다. 지석영만 천연두와 싸워온 사람으로 추대하기에는 억울한 사람이 많다.
글 : 심우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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