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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지상 최대의 동물인 코끼리는 이름처럼 코가 가장 긴 동물이다. 코라고 부르지만, 사실 윗입술과 코가 합쳐진 기관이다. 무려 15만 개의 근육으로 이뤄져 있어서 수백kg 이상을 들어 올릴 수 있다. 인터넷에는 성난 코끼리가 코로 나뭇가지를 잡고 흔들거나 던져서 사나운 맹수를 퇴치하는 동영상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그래서 코끼리에게는 (인간을 제외하고는) 천적이 없다.
■ 후각 수용체 유전자가 개의 2배, 사람의 5배
최근 과학자들은 코끼리 코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 밝혀냈다. 일본 도쿄대 응용생화학과 니무라 요시히토 교수팀은 아프리카코끼리를 비롯해 오랑우탄, 쥐, 개 등 포유동물 13종의 후각 수용체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OR유전자, Olfactory Receptor)를 비교했다. 놀랍게도 아프리카코끼리에게 약 2,000개에 달하는 OR유전자가 있었다. 냄새를 잘 맡기로 유명한 개보다 2배 이상 많은 숫자였다. 유인원과 인간에 비하면 5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동물의 후각 능력은 OR유전자의 수와 밀접한 상관이 있다. OR유전자가 많으면 훨씬 더 다양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 린다 벅 교수는 2004년 냄새분자와 코 안에 있는 후각 수용체 단백질이 마치 열쇠와 자물쇠처럼 짝이 맞으면 뇌로 신호를 보내 냄새를 인지한다는 후각 메커니즘을 제안했다. 냄새분자가 수용체와 결합하는 패턴으로 어떤 냄새인지 인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냄새를 맡으려면 다양한 후각 수용체 단백질이 필요하다. 즉, 이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OR유전자가 많아야 한다. OR유전자는 재조합 기능이 없어서 유전자 하나가 화학물질 하나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야생코끼리의 후각이 뛰어나다는 건 일찌감치 밝혀진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이다. 2007년 11월 의학 전문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는 아프리카코끼리가 먼발치에서 코만 한 번 벌름거려도 위협적인 부족과 그렇지 않은 부족을 구별해낸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영국 세인드앤드루스대의 진화심리학자 리처드 바이른 교수는 아프리카 케냐 지방에 사는 야생코끼리들이 그 지역에 사는 마사이족 사람에게만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보고를 받았다. 물론 마사이족은 종종 코끼리를 사냥해 왔기 때문에 코끼리가 공격하는 게 당연했는데, 흥미로운 건 그 다음이었다. 마사이족이 아닌 다른 사람일 경우에는 바로 눈앞에서 코끼리에게 뾰족한 창을 휘둘러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사냥하는 부족 농사짓는 부족, 냄새로 구별한다
연구팀은 다양한 행동 실험을 통해 아프리카코끼리가 마사이족의 빨간 옷과 고유의 사냥 자세를 구별할 줄 안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후각으로도 마사이족을 구분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연구팀은 마사이족 사람과 다른 부족 사람이 입었던, 같은 색상의 옷을 코끼리에게 주고 행동을 관찰했다. 그 결과, 마사이족 옷에만 난폭한 행동을 보였다.
바이른 교수팀은 3개월 뒤인 2008년 2월, 코끼리들이 가족 구성원이 매일 어디에 있는지를 그들의 소변 냄새로 파악한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했다. 야생코끼리는 거대한 모계 가족을 이뤄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 함께 여행하면서 먹을 것을 구하고 서로를 보호해준다. 각 코끼리는 더 작은 무리로 나눠지거나 혼자 무리에서 떨어지더라도 서로 지나간 경로를 파악하면서 따라가야 한다. 이 때 후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케냐 암보셀리 국립공원의 땅바닥에서 코끼리 소변 샘플을 모았다. 소변의 주인공은 가족 구성원이 아닐 수도 있고, 무리의 선두에 있거나 한참 뒤처져 있을 수도 있었다. 연구팀은 소변 샘플의 냄새를 코끼리들에게 맡도록 하고 얼마나 많은 코끼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관심을 보이는지 측정했다. 그 결과, 가족 구성원이 아니거나 이미 앞서간 코끼리의 소변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반면, 뒤에서 걷고 있는 코끼리의 소변 냄새에는 오랫동안 관심을 보였다. 자기보다 뒤에 있는 코끼리의 소변 냄새가 난다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연구팀은 “이런 행동으로부터 코끼리가 가족 구성원이 누구인지, 또 자신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아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코끼리의 후각은 얼마나 뛰어날까. 스웨덴 린셰핑대 생물학과 마티아스 라스카 교수팀은 아시아 코끼리 세 마리를 대상으로 후각능력이 얼마나 정밀한지 연구한 결과를 2012년 12월 학술지 ‘화학감각(Chemical Senses)’에 발표했다. 원소의 종류나 위치가 한두 개 정도만 달라 화학구조가 매우 비슷한 냄새 분자 2개를 각 통로에 흘린 뒤, 먹이가 있는 곳의 냄새를 맞출 수 있는지 시험했다. 그 결과, 코끼리는 실험에 쓰인 총 12쌍의 냄새 분자를 높은 확률로 구별했다. 같은 테스트를 받은 원숭이나 물개, 꿀벌, 사람보다 훨씬 나은 성적이었다.
■ 후각은 생존환경에 따라 퇴화하기도 발달하기도
원래 인간을 비롯한 포유류의 조상들은 지구에 처음 등장했을 때 후각 수용체 수가 비슷했다. 그런데, 왜 후손들의 후각 능력은 달라진 걸까. 그리고 코끼리의 후각 능력은 왜 이토록 뛰어난 걸까. 요시히토 교수팀은 최신 컴퓨터 기법을 통해 후각 수용체 유전자, 즉 OR유전자의 진화 역사도 추적했다. 1만 가지 종류의 OR유전자를 연구한 결과, 13종의 포유동물이 공유한 것은 겨우 3개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어떤 원시 유전자는 코끼리에서 84개의 유전자로 확장된 데 비해, 인간과 유인원에서는 유전자 1개로 남아 있었다.
왜 이렇게 진화했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생존환경에 따라 필요 없는 수용체(유전자)는 퇴화하고 필요한 수용체는 늘어났을 것이다. 요시히토 교수는 “영장류 같은 고등 동물일수록 시각 정보에 의존하기 때문에 OR유전자가 퇴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의 후각 수용체는 절반으로 줄어든 데 비해 쥐나 코끼리에서는 늘어났다는 사실이 왠지 서글프게 다가온다. 코끼리에게 탁월한 후각능력이 필요했다는 건 그만큼 코끼리가 살기 어려웠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글 : 우아영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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