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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은 정조(正祖, 1752~1800)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1796년에 만들어진 성입니다. 당시 기술로는 구현되기 어려웠던 거중기나 녹로와 같은 신기재를 사용했습니다. 축성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함께 상업적 기능도 함께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실용적인 구조로서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2016년은 수원 화성이 축성된 지 220주년 되는 해입니다. 2016년 과학향기에서는 수원 화성에 담긴 의미와 과학기술, 또 우리나라 주요 성곽이나 한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사극은 한국영화 흥행 순위 상위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해왔다. 2010년에는 ‘전우치’가 3위를 기록했고 2011년에는 ‘최종병기 활’이 1위를 차지했다. 2012년에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2위에 올랐고 2013년에는 ‘관상’이 3위를, 2014년에는 ‘명량’이 1위를 거머쥐었다. 지난 2015년에도 사극의 저력이 증명됐다. ‘사도’가 ‘킹스맨’과 ‘미션 임파서블’을 누르고 5위에 오른 것이다.
영화 ‘사도’의 매력은 비극적 스토리에 있다. 1762년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8일 동안 밥도 물도 먹지 못하다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결국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의 실제 사건을 그렸다. 사도세자가 남긴 아들은 스물다섯 살에 영조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의 22대 임금에 올랐다. 이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진 정조 대왕이다. 고통 속에 죽어가던 아버지의 최후를 열한 살 때 목격한 정조는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평생을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수원 화성’이다.
정조는 1776년 3월 즉위한지 열흘 만에 아버지의 묘소 호칭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바꿨다. 묘소는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 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즉위 13년째인 1789년에는 윤선도가 ‘천 년에 한 번 나올 명당’이라 극찬했던 경기도 화성시 송산리 인근의 화산 자락으로 이전하고 호칭을 ‘현륭원’으로 다시 고쳤다. 문제는 그 장소에 수원읍이 위치해 있었다는 점이다. 정조는 수원읍을 10km 가량 북쪽으로 옮겨 팔달산 자락에 새로 지으라고 지시했다. 신도시를 만들라는 어명이었다.
정조는 신도시 수원을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 삼고 싶어 했다. 독특한 모습을 지닌 ‘임금의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도시가 커지려면 상업이 발달해야 했다. 전국의 산물이 모이는 한양의 경제적 이점과 연계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정조는 부자들에게 자본금을 주고 수원에서 장사를 시작하도록 지원했다. 덕분에 수원은 금세 상업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도시가 제 기능을 하려면 외곽 전체에 낮은 성벽을 둘러서 ‘읍성’을 갖춰야 했다. 세계 대부분의 문화권은 방어와 보호의 목적으로 성을 쌓았다. 산지가 발달한 우리나라는 산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해왔다. 경제가 점점 발달하면서 변란(變亂) 때마다 생활 터전을 버리고 매번 옮기는 일이 어려워졌고, 결국 도시 주위에 읍성을 쌓아서 보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새로 마련된 수원읍도 주변에 성을 둘러쌓아야 했다.
사진. 수원 화성의 화서문(출처: wikipedia/bifyu)
정조는 서른한 살의 젊은 신진학자 다산 정약용에게 새로운 형태의 읍성을 구축하라고 지시했다. 다산은 1792년 기본 설계를 마치고 ‘성설’이라는 이름의 설명서를 지어 올렸다. 돌을 깎아 성을 쌓되 여느 읍성보다 더 크고 높이 짓도록 했다. 둘레는 3천600보, 즉 4.2km로 하고 높이는 2장 5척, 즉 7.75m로 했다. 기존의 국내 성곽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술도 비교하고 검토해 형태와 기능 면에서 가장 낫다고 여겨지는 아이디어를 총동원했다.
성벽 아래에는 참호를 파서 연못을 만들고 성벽의 모양은 아래부터 3분의 2 지점까지는 조금씩 안쪽으로 들인다. 거기서 윗부분은 다시 바깥쪽으로 내어 중간이 홀쭉해 보이도록 만드는 ‘규형’ 방식을 채택한다. 성문 앞에는 항아리 모양으로 감싸 안는 별도의 ‘옹성’을 덧붙여서 적들이 한 번에 들이치지 못하도록 방어력을 높인다. 성문 위에는 ‘누조’라는 물통을 준비해 두었다가 적군이 불을 지르면 오성지라는 다섯 개의 구멍을 통해 물을 흘려보낸다. 성벽 중간마다 밖으로 내어 지은 ‘치성’을 쌓고 대포와 활을 배치한다.
정조는 이러한 제안을 거의 다 받아들였고 성벽 축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다산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기구와 장비 10가지도 새로 고안해냈다. 대표적인 것이 도르래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손쉽게 들어 올리는 대형 ‘거중기’와 그보다 작은 ‘녹로’다. 이외에도 언제나 수평을 유지하는 짐수레 ‘유형거’, 소 40마리가 끄는 ‘대거’, 10마리가 끄는 ‘평거’, 그와 유사한 ‘별평거’, 1마리가 끄는 ‘발거’, 사람 4명이 끄는 소형 수레 ‘동거’, 둥근 나무 막대를 깔고 그 위로 돌을 미끄러뜨리는 ‘구판’, 바닥이 활처럼 굽어 있는 수레 ‘설마’, 당시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의 기술을 참조하되 독자적인 발상으로 만든 것들이다.
장비까지 발명한 이유는 공사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국가에서 건축물을 지을 때도 강제로 동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노임을 주고 인부를 사는 체계가 굳어져 있었다. 무거운 석재를 나르려면 그만큼 인원이 늘어나야 해서 품삯이 많이 들었다. 적은 숫자로 큰일을 할 수 있다면 공사 기간과 비용을 한꺼번에 줄일 수 있었다.
1794년 정월에 시작된 공사는 2년을 넘겨서 1796년 9월까지 진행됐다. 한여름에는 더위 때문에, 한겨울에는 추위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건물과 성벽이 세워졌다. 지형에 맞춰 설계를 바꾸느라 애초보다 둘레가 1천보 가량 늘어났으며 마침내 총 5.2km의 성벽이 완공됐다. 곳곳이 유려한 곡선으로 휘어져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웠고 내구성과 방어 측면에서도 유리했다.
일정 간격을 두고 만들어진 성문에는 목조 건축물을 올려 예술성을 보탰다. 목재를 현란하게 짜 맞춘 공포를 주된 기둥 윗부분에 올리는 방식을 주심포 방식이라 하는데, 정문에 해당하는 남쪽의 팔달문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치하는 다포 방식으로 지어 화려함을 갖췄다. 동쪽의 창룡문과 서쪽의 화서문은 처마를 지탱하는 공포를 간결하게 바꾼 조선 고유의 익공 방식을 적용했다. 석축 성벽과 목조 건축물의 연결 부위는 벽돌을 쌓음으로써 아름다움과 기능을 모두 만족시켰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가 위치한 화산(花山)과 연계성을 두기 위해 수원읍성의 이름을 비슷한 발음의 ‘화성(華城)’으로 정했다. 지금은 인접한 경기도 화성시와 구분하려 ‘수원 화성’이라고 부른다. 화성은 독특한 발상과 독자적인 기술 이외에 꼼꼼한 기록도 갖췄다. 정조는 공사 전체의 기록을 10권 8책으로 총망라해 ‘화성성역의궤’라는 서적으로 펴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굳은 의지, 다산의 혁신적인 제안, 조선의 발달된 과학기술, 전체 과정을 담은 엄밀한 기록물 등 당대의 총체적인 역량이 한데 모인 예술과 기술의 합작품이다. 덕분에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고 지금도 수원시의 중심에서 늠름하고 수려한 모습으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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