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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성 갖춘 동양 성곽의 백미, 수원 화성

제 2594 호/2016-02-24


혁신성 갖춘 동양 성곽의 백미, 수원 화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은 정조(正祖, 1752~1800)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1796년에 만들어진 성입니다. 당시 기술로는 구현되기 어려웠던 거중기나 녹로와 같은 신기재를 사용했습니다. 축성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함께 상업적 기능도 함께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실용적인 구조로서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2016년은 수원 화성이 축성된 지 220주년 되는 해입니다. 2016년 과학향기에서는 수원 화성에 담긴 의미와 과학기술, 또 우리나라 주요 성곽이나 한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수원 화성은 조선시대 수원의 도심 전체를 둘러싼 전체 길이 5.4km 가량의 읍성 형태 성곽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인근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이름 지은 후 다산 정약용에게 설계를 명령했다.
 1792년 초안에서는 성곽의 길이가 4.2km 정도였지만 1794년에서 1796년까지의 축성 과정에서 1km가 늘어났다. 

화성 성곽은 부드러운 곡선 형태로 이어지며 들쭉날쭉 지어졌다. 화성의 건축 과정을 기록한 비석 ‘화성기적비’에는 “봄의 버들잎 같은 모양으로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팔달산 아래에 유천 즉, 버들개천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정조도 “성벽을 세 번 구부리고 세 번 꺾으면 이름처럼 ‘내 천’자 모양이 됐다”고 평가했다. 

중간 중간에 설치된 ‘방어시설’이 수원 화성을 기존의 읍성이나 성곽과는 확연히 달라지게 했다. 일반적인 읍성은 야트막한 담장이 이어질 뿐 별다른 방어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와 달리 화성은 100m 간격으로 방어시설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능을 포함하고 있었다. 화성의 방어시설은 모두 48개소로 문, 대, 돈, 누 등으로 크게 나뉜다. 

문(門)은 평상시에 출입하는 성문, 적의 눈에 띄지 않는 암문, 물이 흘러가는 수문으로 나뉜다. 대(臺)는 성문의 좌우에 솟아서 적을 감시하는 적대, 장수가 부대를 지휘하는 장대, 깃발을 흔들거나 쇠뇌를 쏘는 노대로 나뉜다. 돈(墩)은 감시를 하거나 포를 쏘는 곳으로 망루와 같은 공심돈, 봉화를 피우는 봉돈이 있다. 

누(樓)는 주변을 한눈에 바라보는 각루, 포를 쏠 수 있게 튀어나온 포루(砲樓), 군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포루(鋪樓)의 3가지로 나뉜다. 이외에도 성벽에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도록 튀어나온 치성(雉城), 군사가 머무르며 기거하는 포사(鋪舍)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방어시설을 갖춘 성곽은 우리나라에서 수원 화성이 유일하다. 

성문은 동서남북 4개가 있었다. 동문은 창룡문, 서문은 화서문, 남문은 팔달문, 북문은 장안문이라 이름 지었다. 성문 밖에는 옹성, 즉 항아리 같이 둥근 성벽을 둘러서 외적이 대포나 무기로 성문을 직접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중에서 북문과 남문은 옹성에도 문을 내어서 출입을 쉽게 만들었다. 한양에서 수원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는 도로망을 중시한 결과다. 대신에 성문 양쪽에 대칭으로 적대를 쌓고 뜨거운 물과 기름을 부을 수 있는 홈을 파서 방어력을 높였다. 

사진 1. 창룡문(출처: wikipedia/oreum)사진 2. 화홍문(출처: wikipedia/Thomasrhee)


돈 중에는 속이 비었다는 뜻의 공심돈이 눈길을 끈다. 성곽 위에 벽돌을 쌓아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3층의 누각을 짓되 내부를 비워서 군사들이 머물게 했다. 원래 3개가 있었지만 남공심돈은 사라지고 사각에 가까운 서북공심돈과 타원에 가까운 동북공심돈이 남아서 독특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진 3. 서북공심돈(출처: wikipedia)사진 4. 동북공심돈(출처: wikipedia)


그런데 공심돈을 비롯한 화성의 여러 건물은 왜 벽돌로 지은 것일까.
 우리나라에도 벽돌로 무덤을 만드는 전통이 있었지만 집이나 건물을 지을 때는 대부분 나무를 사용했다. 문제는 질 좋은 목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18세기의 조선 실학자 중에서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벽돌로 집을 지어 사는 모습을 보고 국내 도입을 적극 추천했다. 특히 물과 불이 닿아야 하는 성곽에 적합해서 결국 화성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벽돌 제작은 중국의 기술을 응용하되 쓰임새에 맞춰 여러 모양을 새로 고안해냈다. 정사각형 모양의 방전을 기본으로 삼아 대방전과 소방전을 만들되 절반으로 잘라낸 듯한 길쭉한 모양의 반방전도 구웠다. 둥근 부분을 쌓아올릴 때는 무지개 벽돌이라는 뜻의 홍예전을 사용했고 모서리에는 종벽과 개벽이라는 각진 벽돌을 박아 넣었다. 

기존의 목재와 석재 사용에서 벗어나 벽돌을 도입하면서 화성의 건축물은 다채로운 형태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건축물을 만들 때만 사용했다가 벽돌 제작 기술이 발전하자 복잡한 형태의 건물에도 벽돌을 적용해 완성했다. 외국의 기술을 도입하고 개선해 고유의 것으로 전환시킨 셈이다. 

방어용 성곽과 시설로 둘러싸인 화성은 서울에서 남쪽 전국으로 내려가는 도로망의 핵심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정조의 권한을 드높이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관청 이외에 별도로 ‘행궁’을 지은 것도 특이하다. 행궁은 왕이 잠시 머무는 궁궐이라는 뜻을 지녔으며 전국 곳곳에 지어졌다. 그중에서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의 묘소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수원을 찾아올 때마다 사용했다. 처음에는 ‘장남헌’이라는 큰 건물 한 채만 지었다가 이후 620칸에 이르는 부속건물을 갖추어 조선 최대의 규모가 됐다. 그러나 크기와 외양은 검소함을 유지했다. 보통의 정부 건물보다 큰 것은 없었고 임금이 머무는 곳임에도 단청을 아껴서 소박한 모습으로 두었다. 

화성 축조는 1794년에 시작됐는데 이듬해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잡혀 있어 행궁을 증축할 필요가 있었다. 행궁의 여러 건물 중 혜경궁 홍씨의 처소로 사용될 ‘장락당’이 제일 먼저 지어졌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정치력을 높이는 전략적 건축물이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는 효도의 마음이 담긴 기념물인 셈이다. 애석하게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거나 사라져 빈 터만 남게 됐다.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지금은 장락당을 비롯해 480칸 이상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수원 화성을 혁신이라 부르는 이유는 다양하다. 석재, 목재, 벽돌이 함께 쓰여 독특한 건축물이 탄생했고, 과거부터 이어지던 전통의 기술을 한층 개선시켜 적용했으며, 중국과 서양 등 해외의 기술을 도입하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우리의 것으로 소화시켰고, 전쟁 대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위해 하천을 준설하고 상업 활성화를 위해 도로망을 확충하는 등 종합적인 의도가 하나로 합쳐졌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이러한 혁신성을 인정받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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