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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단을 외자! 구구단을 외자” 


인기리에 방송됐던 모 예능 프로그램의 구구단 게임을 알리는 이 노래가 나오면, 시청자들은 연예인들의 구구단 실력이 궁금해 TV화면 앞으로 모여 들었다. 갑자기 던져지는 구구단 문제에 가끔씩 황당한 답변을 하는 참석자들을 보며 박장대소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처럼 게임에까지 활용될 정도로 구구단은 무척이나 친숙한 존재다. ‘수학(數學)은 몰라도 생활하는데 있어 별다른 지장이 없지만, 구구단을 모르면 애로사항이 많다’라는 말이 있듯이, 구구단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셈법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우리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구구단은 언제 만들어 졌을까? 외국에서 만들어졌을까? 외국에서 만들어졌다면 우리 땅에는 언제 들어 왔을까? 모두가 한번쯤은 떠올려 보았을 이런 궁금증에 분명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놀라운 유물이 최근 공개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 백제시대에 작성된 구구단표 발굴 


놀라운 유물이란 한국문화재재단이 지난 2011년에 발굴한 목간(木簡)을 말한다. 목간이란 종이가 발명되기 전 기록을 위해 사용하던 나무판으로서, 소나무를 얇은 형태로 가공한 것을 말한다. 


이 목간이 화제가 된 까닭은 나무판 일부에 구구단표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목간이 발견된 충청남도 부여의 유적지는 과거 백제 사비성터였기에, 발견 당시부터 목간이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됐고,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에서도 6~7세기의 백제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2011년에 발견된 목간의 구구단표가 어째서 5년 뒤인 최근에서야 알려졌을까? 이렇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발견 당시만 해도 발굴 관계자들은 숫자가 적힌 목간을, 물품의 수량을 적은 일종의 ‘표’로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간은 표로 여겨진 채 장기간 보관돼 있었는데, 최근 들어 한국목간학회 등 관련 전문가들이 정밀 판독한 결과, 이 목간이 물품 확인용 표가 아니라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구구단 표임을 확인한 것이다. 


실제로 목간 전면을 살펴보면 희미하게나마 먹글씨로 ‘三(삼)四(사)十二(십이)’ 와 같이 구구단 공식이 쓰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나머지 글자들은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데, 이들도 적외선 촬영으로 관찰하면 ‘칠구 육십삼’이나 ‘육팔 사십팔’, 그리고 ‘육칠 사십이’ 와 같은 구구단 공식들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재단 관계자의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이 목간이 기존의 중국과 일본에서 발견된 것과는 달리 매우 체계적이면서도 실용적으로 작성됐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근거로 2단부터 9단까지 칸을 나누어 구구법을 기록한 것이나, 각 단 사이에 가로 선을 그어 구분을 명확히 한 점을 들었다. 


이에 대해 문화재재단 관계자는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 등에 관련 기록이 있었을 뿐, 실제로 구구단표가 적힌 유물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하며 “이번 유물은 백제 시대에 이미 수리 체계가 정립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 한반도의 구구단표 유입시기와 관련된 논란 잠재워 


이번 백제시대의 구구단표 발견은 한·일 역사학자 간에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한반도의 구구단표 유입 시기에 대해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구구단표가 최초로 만들어진 곳이 중국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없다. 중국은 기원전 3세기쯤 리야유적에서 구구단이 적힌 목간표를 출토한 바 있고, ‘관자’나 ‘순자’와 같은 책에도 구구단 외우는 방법이 소개돼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구구단이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했다. 국내 역사학계는 ‘광개토대왕릉비’나 ‘삼국사기’ 등의 문헌에 구구단 같은 셈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에 의거해 유입 시기를 삼국시대로 보았다. 다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없어 가설로만 여겨졌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 역사학계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처음 구구단을 조선에 도입했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산수(算數)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조선에 자신들이 구구단과 같은 다양한 선진 산학(算學)을 도입시켜 조선인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일본의 구구단 유입은 약 8세기로서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같은 주장은 지난 2000년대 초반에 발굴된 구구단표 관련 유적으로 인하여 정설로 굳어졌다. 


당시 발굴된 유적을 보면 ‘구구여팔십일(九九如八十一)’이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같을 여(如)’가 9×9=81과 같이 등호(=)를 표현하는 한자식 표현이라는 것이 일본 전문가들의 해석이었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듯 실제로 중국의 8세기 대 문헌에도 바로 구구 여 팔십일처럼 ‘는(=)’에 해당하는 곳에 ‘같을 여’자가 쓰여 있는 사례가 나와 있다. 일본은 이 같은 사례를 근거로 대륙에서 일본으로의 직접 전래 가능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이번에 발견된 백제시대의 구구단표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백제유적에서 발견된 목간의 제작 시기가 6~7세기 시절임이 확인됨으로 인해 일본의 주장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마치 미개한 조선을 근대화시킨 기간이었던 것처럼 주장하며 온갖 오만을 떨던 일본이 이번 물증 앞에서는 코가 납작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모르긴 몰라도 근현대 이전에는 늘 한반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해 간 일본이기에 자신들의 땅에서 발견됐다는 구구단표도 중국에서 직접 넘어 간 것이 아니라 백제를 거쳐 넘어갔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늘 그래 왔으니까. 


글 : 김준래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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