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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에서 온 해괴한 모욕’ 


1954년 화학결합의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응용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라이너스 폴링(1901~1994)이 1962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전한 미국 ‘라이프’지의 기사 제목이다. 당시까지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사람은 마리 퀴리에 이어 그가 두 번째다. 그만큼 폴링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미국에게 커다란 영광이었으나 미국 정부와 언론은 폴링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도대체 폴링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그의 첫 번째 노벨상은 당연히 그의 연구업적으로 받았다. 그는 1920년대 말 완성되고 있던 새로운 양자역학의 개념을 활용해 원자 오비탈의 혼성화(hybridization)와 공명(resonance) 등 화학결합의 핵심적인 개념을 정리했다. 예를 들어 탄소 원자가 가지고 있는 4개의 원자가 전자는 둥근 모양의 2s 오비탈에 2개가 들어가고, x와 y쪽을 향한 아령 모양의 2px와 2py 오비탈에 각각 1개씩 전자가 들어간다. 


이때 만약 에너지가 낮은 2s오비탈의 전자 중 하나가 에너지가 높은 2pz 오비탈로 올라가면 2s, 2px, 2py, 2pz 오비탈에 각각 1개씩의 전자가 들어가는 상태가 된다. 그 결과 이들 4개의 오비탈들은 서로 수학적으로 혼합돼 새로운 4개의 ‘혼성 오비탈’을 형성한다는 것이 폴링의 생각이다. 이를 ‘sp3 혼성 오비탈’이라 부른다. 이 개념을 사용하면 유기화합물과 전이금속 화합물의 모양을 매우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에게 주어진 노벨 화학상도 이 공로가 인정된 결과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노벨상은 반전?반핵 평화운동으로 받았다. 1950년대 폴링은 연구활동 뿐 아니라 세계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핵실험을 제한하자는 청원운동을 벌였다. 이런 노력은 1963년 8월 5일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 체결로 이어졌고, 노르웨이의 노벨 평화상 위원회는 이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반면 미국 정부는 폴링의 이런 노력이 미국의 국익을 침해한다고 생각했다. 냉전시대 소련과 군비경쟁을 하던 미국으로선 반전?반핵 평화운동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국 정부의 냉담함은 폴링을 매우 힘들게 했다. 1952년 영국 왕립학회가 주관하는 DNA 관련 심포지엄의 연사로 그는 초청받았지만 미국 국무부는 여권 발급을 거부했다. 만일 폴링이 이 심포지엄에 참석해 왓슨과 크릭처럼 럿셀과 프랭클린이 제출한 DNA의 X선 사진을 보았다면 그가 DNA 구조를 먼저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1990년의 한 인터뷰에서 폴링은 왓슨과 크릭이 DNA구조를 해명한 방법이 오래 전에 자신이 단백질의 알파 나선형 구조를 밝힐 때 사용한 바로 그 방법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애석히 여겼다. 


이후 폴링은 2년 이상 국제학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심지어 1954년 폴링이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결정됐을 때도 국무부는 폴링을 수상식에 참석토록 허락할 것인지에 관해 논란을 벌인 끝에 여권을 발급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폴링은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평화운동에 참여했다. 1957년부터 폴링은 아내인 아바 폴링과 함께 대기 중 핵실험 금지를 위한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또 강연을 통해 대기 중 핵실험이 수백만의 생명을 방사능에 노출시킨다며 대중을 설득했다. 이 운동으로 1958년 미국인 2000여명을 포함, 49개국 1만1000여명의 과학자가 서명한 청원서가 만들어졌다. 폴링은 이것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출했다. 


이처럼 굽힐 줄 모르는 폴링의 신념은 서서히 사람들을 움직였다. 1962년 폴링은 미국 정부가 핵실험을 재개한 것에 항의해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바로 그날 저녁에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초대한 노벨 수상자와의 만찬에 참여해야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다행스럽게 이날 폴링을 초청한 케네디 대통령은 그를 비난하는 대신 자신의 의견을 계속해서 표현하라며 그를 격려했다. 


마침내 1963년 8월 5일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대기권 내, 우주공간 및 수중에서 핵무기 실험을 금지하는 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은 그 해 10월 미국, 영국, 소련의 비준에 의해 발효됐다. 비록 지하 핵실험은 규제 대상에서 제외됐고, 위반사항에 대한 사찰을 명시하지 않은 제한된 의미의 조약이었지만, 이는 핵무기의 규제에 관한 최초의 국제협정이었으며 폴링의 지속적인 투쟁의 결실이었다. 


정부의 정치적 압력, 연구비 지급 중단의 위협, 다른 과학자들의 질시, 정부에 맞서는 매국노라는 낙인, 나아가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대중의 비난은 과학자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시련이었다. 그럼에도 폴링은 꿋꿋이 견뎌냈다. 훗날 폴링은 “내가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지탱해준 것은 나를 존경의 눈길로 보던 아내였다”며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그의 아내를 꼽았다. 그에게 아내인 아바 폴링은 자신의 내조자이자 평화운동의 실질적인 동료였던 것이다. 


평소 놀라운 기억력과 상상력으로 유명했던 폴링은 논리적인 접근보다 자신의 타고난 직감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문제 해결 방법을 “가정을 이용해 진실을 밝힌다”는 의미에서 ‘확률론적 방법’이라고 불렀으나 때로는 그의 주장이 너무 자신의 영감에만 의존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말년에는 확실한 근거도 없이 비타민C가 감기와 암에 특별한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며 매일 엄청난 양의 비타민C를 복용했다고 한다. (글 : 서금영 과학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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