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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와 연말이 겹친 12월. 송년회다 뭐다 해서 유난히 술자리가 많다. 40대 김 과장도 연일 술을 마시고 있다. 그런데 요즘 뭔가 이상하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술을 먹기만 하면 기억이 뚝-뚝- 잘도 끊어진다. 처음엔 ‘이제 나이가 들었구나’하고 웃어 넘겼는데, 두세 번 반복되다 보니 걱정이 된다. 마시는 양을 줄여보기도 하고 소주 대신 고급 양주를 마시기도 했지만 증세는 심해질 뿐. 급기야 송년회 중간에 기억이 사라진 뒤 눈 떠보니 사무실 바닥에서 자고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김 과장처럼 ‘필름 절단 사고’를 한두 번쯤은 겪어봤을 것이다. 필름 끊긴 상태에서 벌이는 추태도 걱정이지만, 내가 했던 일인데 나만 기억을 못 하고 있다는 두려움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술을 마시면 왜 이렇게 필름이 끊기는 걸까? 


필름이 끊기는 이유를 말하려면 뇌의 기억 메커니즘을 알아야 한다. 기억에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있다. 단기기억은 1분에서 1~2시간 이내의 경험이나 감정이 뇌에 임시로 저장된 것이다. 단기기억 중 중요한 부분만이 장기기억으로 바뀌는데, 이 과정은 뇌의 앞쪽인 측두엽 안쪽에 있는 ‘해마’라는 기관이 담당한다. 장기기억으로 저장되지 못한 단기기억은 곧 사라진다. 반면에 일단 장기기억으로 전환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건망증을 호소하는 이유는 장기기억을 꺼내지 못하거나, 단기기억이 아예 장기기억으로 저장되지 않았던 탓이다. 


술 마시다 발생하는 ‘필름 절단 사고’는 바로 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문제가 발생해서 일어난다. 즉 기억이 안 나는 이유는 기억을 꺼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저장된 기억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술 마시다 사라진 기억은 최면을 걸어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술자리 중간의 기억이 드문드문 나는 것은 기억이 저장됐다 안 됐다 했기 때문이며, 김 과장처럼 ‘술 마시다 정신 차려보니 낯선 방’ 상황은 그 사이의 경험이 통째로 저장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술을 마실 당시 만난 주변 사람들은 당사자가 필름이 끊겼다는 것을 알지 못 한다. 해마 외의 다른 부분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서 술에 취한 것을 빼면 말이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저장돼 있는 중요한 기억들, 즉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은 멀쩡히 살아있기 때문에 계산을 하거나 집에 돌아가는 데도 전혀 이상이 없다. 오직 기억만이 사라질 뿐이다. 


그럼 어느 정도 술을 마시면 기억이 끊길까? 70년대 미국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필름이 가장 많이 끊기는 시점은 보통 혈중 알코올 농도 0.2% 정도라고 한다. 이는 체중 70kg의 남자가 25도인 소주를 한 병 반 조금 못 되게 마신 정도다(소주 한 병 반 = 약 500ml). 물론 이 결과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몸 상태나 술을 마신 속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드물게 선천적으로 필름이 안 끊기는 사람도 있다. 


필름이 끊기는 현상은 조금 과장하자면 뇌가 술 마시는 중에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거기다 김 과장의 예처럼 한 번 ‘끊기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예전보다 쉽게 끊긴다. 쉽게 말해서 ‘그만 좀 마시지?’라는 뇌의 경고인 것이다. 그렇지만 몸 상태보다는 입 안에 감도는 알코올의 향을 택하는 애주가들은 이 경고를 무시하기 일쑤다. 


당장 술을 마시고 싶다고 이런 경고를 계속 무시하면 기억을 못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있던 기억도 버려야 할 지 모른다.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기는 상태가 반복되면 뇌질환 중 하나인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에 걸릴 수 있다.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은 과도한 알코올이나 다른 요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뇌질환으로, 크게 ‘베르니케 뇌증’과 ‘코르사코프 증후군’의 두 가지 증세로 나눠진다. 


초기 급성 상태인 베르니케 뇌증은 안구운동장애, 보행장애 등을 보이는데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태가 발전해 뇌세포가 파괴돼 기억장애가 일어나는 코르사코프 증후군이 되면 장기기억이 점점 줄어들다가 급기야 ‘있는’ 기억도 사라지게 된다. 전문가에 따르면 이런 점에서 알코올성 기억 장애는 치매와 비슷하다고 한다. 


한 두 시간 잊는 것쯤은 괜찮다고 넘어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술자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시시콜콜 기억해서 속만 쓰린 것보다는 적당히 잊는 게 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뇌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기억을 외면하다보면 어느 순간 지난 인생이 전부 사라질 수 있다. 새해에는 자신을 위해서 술과의 긴 우정을 조금 잊어보는 것이 어떨까? (글 : 김은영 과학전문 기자) 


● 혈중알코올농도={주류의 알코올농도(%) x 마신양(ml) x 0.8}÷{0.6 x 체중(kg) x 1000}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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