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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 

테이블 한 쪽에 배를 깔고 앉아있던 검은 전갈 아웃레스가 씹어뱉듯 말을 던졌다. 비좁은 오두막에서 그의 목소리는 생생하게 울렸다. 한참 침묵만 지키고 있던 그의 한마디에 다른 이도 고개를 들었다. 


“뭐가 억울하다는 거죠?” 

드라큐리가 물었다. 그녀는 아웃레스가 바닷가에 있는 이 낡은 오두막에 몸을 숨겼다가 만난 박쥐 소녀였다. 사람들을 피해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는 그녀는 이름이 촌스럽다는 아웃레스의 말에 ‘당신 이름도 만만치 않아요!’라고 톡 쏘아붙인 후 천장에 발을 걸고 졸고 있었다. 


“그저 갖고 태어난 독 때문에 고향에서 도망쳐 이런 오두막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데 그럼 안 억울하겠어?!” 

아웃레스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분을 삭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독을 써 본 적이 없는 아웃레스의 평온한 삶은 ‘전갈 전문가’라 자칭하는 외지인이 나타나 전갈에 대한 소문을 퍼트리며 엉망이 됐다. “전갈에게 물리면 숨이 막히고 심장이 멎으며 죽는다!”는 그의 외침에 잘 살던 전갈들은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을 피하느라 정말 숨 막히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갈이 몸에 좋다며 노리는 이들까지 나타났다. 친구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그는 결국 고향을 떴다. 


“우리가 꼬리 끝으로 쏘는 사람들은 1년에 1000명이 조금 넘어. 하지만 죽는 사람 수는 1년에 10명도 안 돼. 1000명 중 10명이면 겨우 1%야. 나머지 99%는 한 일주일 앓고 난 뒤 다시 멀쩡하게 잘 살아간다구!” 

“그래도 죽은 건 죽은 거잖아요.” 

드라큐리의 새된 목소리에 아웃레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 한 번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신경자극을 방해해 호흡이나 심장을 멎게 하는 독성 단백질 ‘부타톡신’을 갖고 태어난 것이 죄인 것을. 그래도 할 말은 있어! 


“생각해봐. 누가 널 밟으려 든다면? 갑자기 살고 있는 집을 파헤치고 무기를 들고 찌른다면? 그래도 가만있을 거야? 우린 그저 방어하기 위해 꼬리를 들 뿐이야. 먼저 공격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버럭! 소리를 지른 아웃레스는 침묵을 깨닫고 벌개진 꼬리를 내렸다. 전갈 전문가의 연구실로 잡혀가 간질과 요통을 치료한다는 약재로 다시 태어난 친구들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놈은 진짜 확 찔러주고 싶었는데…. 아니, 아니야. 그 놈을 찌르면 나도 같은 놈이 돼. 아 하지만 그래도…!


“우리 종족의 이야기를 들어도 자네만 계속 억울하다 주장할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상념에 잠겨있던 아웃레스는 쥬스의 목소리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머나먼 호주 앞바다에서 도망쳤다는 이 중년의 백상어는 가장 먼저 오두막을 차지하고 욕조에 누워 도주하며 즐기는 차가운 목욕 한 사발의 여유를 감상하고 있던 터였다. 묵직한 저음과 입이 움직일 때마다 차갑게 번뜩이는 이빨에 아웃레스와 드라큐리는 침만 꿀꺽 삼켰다. 머리 위에 45도 각도로 살포시 얹힌 핑크빛의 깜찍한 프릴 샤워캡 덕분에 폼은 안 났지만 말이다. 


“우린 평화로운 바다 속에서 평화로이 살고 있었다네. 호기심이 너무 강한 것만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 녀석들이었지. 솔직히 피 냄새에 흥분하긴 하지만 대개는 배가 고프거나 공격 받을 때만 이빨을 드러내며 즐겁게 살아왔어. 하지만 인간이 우리 영역에 손과 발을 집어넣고, 기다란 노를 쑤셔 넣고, 그것도 모자라 거대한 스크류를 돌려대면서 일이 잘못 돌아가기 시작했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종족은 애초에 인간을 노리지 않아. 굶주리고 있을 때 우리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먹잇감으로 착각해서 공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거기다 우린 호기심이 강해. 눈앞에서 어정거리면 무심결에 물어보고 싶어진단 말이네. 우리에겐 손이 없으니 확인하고 싶을 때는 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이빨 힘이 조절 안 되는 게 어디 우리 탓인가.” 


그 이빨에 물리면 확인사살당하는 게 당연하지~!!! 

아웃레스와 드라큐리는 속으로 합창했다. 아직도 하얗게 빛나고 있는 공포스런 이빨을 무시할 수 없어 그저 속으로만. 


“1970년대 미국의 스필버거 (스필버그겠지- 아웃레스는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어쩌고 하는 양반이 우릴 소재로 영화를 하나 만들었네. ‘죠스’라는 이름의 거대한 상어가 해수욕장을 습격해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내용이었지. 그런데 사람들이 그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에 우리 전부가 자기들을 죽이고 다닐 거라고 믿게 된 거야. 사실 그 반대인데 말이네.” 

“사람 손에 상어가 죽는단 말씀인가…요?” 

“우리 이웃 철갑상어는 자신들의 뱃속에 든 캐비어 때문에, 다른 친구들은 지느러미를 쓴 샥스핀이라는 요리 때문에 죽어가고 있어. 우리가 죽이는 인간은 1년에 10명 미만, 반대로 인간의 먹거리로 잡혀가는 상어는 약 100만 마리지. 그렇게 우리의 수는 줄어가고 있다네. 인간의 입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느러미를 들고 헛웃음을 짓는 쥬스의 모습에 아웃레스는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가 머쓱해졌는지, 쥬스는 헛웃음과 이빨을 함께 거두고 드라큐리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나저나 거기 어여쁜 아가씨. 댁은 뭣 때문에 여기 있는 건가?” 

“엣? 저요?! 글쎄요….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요." 

꿈을 꾸듯 영롱한 눈동자를 위로 들고 드라큐리는 말을 시작했다. 너무나, 너무나 높은 목소리에 아웃레스는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지만 실례가 될까봐 차마 그 짓은 하지 못 했다. 불평은 많은 주제에 소심하기 짝이 없는 아웃레스였다. 


“흡혈박쥐의 전설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흡혈?! 피를 빨아먹는다는 이야긴가!” 

물을 첨벙 튀기며 쥬스가 물었다. 


“역시 놀라시는군요. 그래요. 우린 피를 빨아먹는다는 이유로 돌팔매질을 받고 있죠. 실제로 남아메리카에 사는 몇몇 친척들은 가축이나 사람의 피를 빨아먹어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피를 먹다보니 광견병 같은 무서운 질병을 옮기기도 한다나 봐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사람들이 위험하니까 식성까지 바꾸라고 할 순 없는 거구요.” 

“그건 맞아. 자기들의 이상한 식성으로 우리에게 끼치는 피해는 생각도 하지 않고!” 

쥬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드라큐리는 “게다가 피를 좋아하는 친척은 아주 적답니다. 우린 더 다양한 걸 먹고 살고 있다구요”라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가족은 달콤한 꿀을 좋아하죠. 꽃에게서 꿀을 얻는 대신, 꽃가루를 옮겨주는 역할을 한답니다. 어떤 친척들은 밤마다 날아다니며 모기나 다른 해충을 먹어요. 대식가로 소문난 친척 오빠는 하루 밤에 6000마리의 모기를 먹는 기록도 세웠죠. 우리가 없으면 해충이 너무 많아지고 전염병이 늘어날 거예요. 번식을 하지 못 해 사라지는 식물들도 많이 생기겠죠.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얕은 지식만 믿을 뿐, 우릴 알려고 하지 않아요.”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마친 드라큐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슬프게 들린다고 아웃레스는 생각했다. 


해가 다시 뜨고 있었다. 창밖을 밝히는 여명을 맞으며 세 동물은 제각각의 상념을 품고 다시 침묵에 파묻혔다. 하지만 이 휴식도 잠깐, 오늘도 그들의 도주와 항변은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함께 살아갈 그 날은 대체 언제쯤 오는 걸까. 저 멀리서 듣지 않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글 : 김은영 과학전문 기자)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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