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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떠 있는 커다란 배를 보면서 나는 가끔 고래를 떠올린다. 바다의 왕인 고래가 물위를 유유히 헤엄치듯 커다란 배는 잘도 떠다닌다. 대형 선박은 고래보다 훨씬 커서 길이 300m를 가뿐히 넘는 것들이 많다. 63빌딩의 높이가 250m가 채 안되니 63빌딩이 한강에 가로로 누워 둥둥 떠다니는 것보다 훨씬 큰 강철고래들이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예부터 영어에서는 이 덩치 좋은 강철고래들을 칭할 때 ‘she’라는 여성인칭 대명사를 써왔다. 

왜 배를 여자로 불렀냐고 묻는다면 정확히 대답할 수는 없지만 짓궂은 바다 사나이들은 농담삼아 “배가 여자로 불리는 이유는 배가 화장(paint)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엄연한 숙녀인 배한테도 화장은 중요한 법! 그래서 오늘은 거대한 그녀(?)의 화장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페인트칠을 한다고 해서 커다란 롤러나 붓으로 칠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커다란 배를 칠하기 위해서는 보통 스프레인 건을 이용해 고압으로 압축한 페인트를 분사시킨다. 큰 배를 다 칠하는데 드는 페인트는 50만 리터를 가뿐히 넘긴다. 50만 리터의 페인트면 농구경기장에 쏟아 부을 경우 농구장(28m x 15m)을 수심 1.2m의 수영장으로 바꿀 수 있는 양이다. 배가 탄생해 첫 외출을 할 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화장을 하는 것이다. 

나는 남자라 잘 모르지만 화사하게 화장하고 거리를 걷는 어여쁜 여자가 화장할 때는 상상할 수도 없는 복잡한 절차가 있다고 한다. 우선 세안을 한 뒤 스킨으로 피부를 정돈하고, 보습을 위해 로션을 바르고, 에센스, 크림, 미스트, 파운데이션, 파우더, 하이라이트, 마스카라, 아이쉐도우, 립메이크업, 볼터치…. 

배도 ‘she’로 불리는 만큼 화장할 때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사람들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스킨, 로션을 처음에 바르듯이 배도 방청성이 뛰어난 페인트를 먼저 발라준다. 대형 선박은 주로 강철로 만드는 데 공기, 물, 이산화탄소와 접촉해 쉽게 녹슬 수 있기 때문이다. 방청성이란 공기와 접촉을 막고 화학적인 방법을 더해 금속이 녹스는 현상을 방지하는 성능을 말한다. 이처럼 배는 방청성이 뛰어난 페인트로 배의 피부인 강철을 보호하는 기초화장을 한다. 

기초화장이 끝나면 본격적인 색조화장에 들어가기 전에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바로 ‘방오(A/F) 페인트’다.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은 배가 대체로 두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두가지 색으로 칠하면 보기에도 좋지만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배는 항상 물에 닿아있어 오래 운항하면 따개비 같은 해양생물이 배 표면에 부착해 서식하게 된다. 이런 해양생물이 많이 붙으면 마찰력이 증가해 배의 운항속도가 느려지고 연료가 많이 소모된다. 방오 페인트는 해양생물의 부착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좀 더 관찰력을 높이면 배의 아래쪽에 칠해진 색이 붉은색이 대부분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방오제의 주성분인 아산화동(Cu2O)이 붉은색을 띄기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에서 건조한 LNG선 / 이탈리아 모비라인이 운영하는 여객선


해양생물이 붙지 않게 하는 방오페인트의 원리는 뭘까? 현재 사용하는 방오페인트의 대부분은 SPC(Self Polishing Copolymer) 타입으로 선박이 운항하는 중 미세하게 닳아 이 때 선체에 부착된 해양생물이 함께 떨어져 나가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벗겨지는 방식은 해양생태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고, 5년마다 정기적으로 다시 페인트칠을 해줘야하는 문제가 있다. 최근에는 개발된 실리콘 기반의 방오페인트는 해양생물의 부착력을 최소화해 떨어뜨리는 방식이라 해양 오염을 줄일 수 있다. 

방청페인트와 방오페인트를 한 번씩 칠하는 것으로 배의 기초화장이 끝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잘못하면 화장이 뜨기(?) 때문에 부착성을 높이기 위한 페인트를 먼저 칠해주기도 하고, 일정 두께 이상을 유지하기 위해 같은 종류의 페인트도 두 번 세 번 나눠 칠한다. 배도 나름대로 예민한 아가씨라서 날씨가 안 좋은 날은 화장이 잘 안 받는다. 비가 오거나, 습도가 너무 높거나, 바람이 많이 불거나, 온도가 너무 낮으면 페인트칠을 할 수 없다. 배를 예쁘게 화장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 끝났으면 본격적인 색조화장 차례다. 배의 색은 운영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군함은 바다에서 상대방에게 잘 보이지 않기 위해서 주로 회색으로 칠한다. 사실은 이 회색의 종류도 은근히 다양하다. 상선의 색은 배를 운영하는 회사의 고유의 색으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 회사 고유의 색으로 배 전체를 칠하고 자기 회사 특유의 마크를 붙여서 멀리서도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한다. 

종종 화려한 화장으로 눈길을 끄는 배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해서 작년에 우수선박으로 뽑힌 블루스카이라는 LNG선은 이름에 어울리는 세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탈리아의 모비라인에서 운영하는 여객선은 루니툰 만화로 화려하게 치장해서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사람처럼 배도 변장을 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사고가 나면 대형 폭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LNG운반선은 일부러 크게 LNG라고 글씨를 써 넣어서 주위 선박들이 조심하도록 해왔었다. 하지만 911사건 이후로 국제적인 테러위협이 증가하면서 오히려 일부로 LNG라는 글씨를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화장을 다르게 해서 LNG운반선이 아닌 일반선박으로 변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기능성 화장품을 쓰듯이 배도 종종 특수 페인트를 사용한다. ‘셀프인디케이트 페인트’를 쓰면 색의 차이로 페인트의 두께를 가늠 할 수 있어 따로 페인트의 두께를 측정할 필요가 없다. ‘PFP(Passive Fire Protection) 페인트’는 불에 닿으면 부풀어 올라서 화재로부터 구조물을 일정 시간 동안 보호하고, 구조물이 타면서 생기는 유독가스를 막아 선원들이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 군함에 ‘RAM(Radiation Absorbing Material) 페인트’를 칠하면 자신에게 날아오는 레이더 파를 흡수하거나 산란시켜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 기능을 얻을 수 있다. 

배의 화장법을 나열하고 보니 사람의 화장만큼이나 복잡하다. 그런데 배가 여자(she)라서 화장한다는 말은 취소해야할 것 같다. 시대가 바뀌어 남녀를 구분하는 단어 사용이 자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해운 일간지 ‘로이드리스트’는 2002년부터 배를 지칭할 때 여성대명사인 ‘she’ 대신 중성대명사인 ‘it’을 사용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하기야 요즘은 남자들도 자신을 가꾸어야 하는 시대이고 더 이상 화장품이 여자의 전유물이 아니니 배가 남자든 여자든 중성이든 화장(paint)을 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겠다. (글 : 유병용, ‘과학으로 만드는 배’ 저자)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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