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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남성 동성애자 5명이 ‘칼리니폐렴’에 걸렸다. 칼리니폐렴은 면역력이 전혀 없는 노인이 걸리는 희귀한 병으로 젊은이들이 걸렸다는 사실은 특이한 일이었다. 환자들의 혈액을 검사하자 놀랍게도 항체를 만드는 세포가 전혀 없었다.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가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
발견된 지 30년이 채 안됐지만 에이즈는 가장 유명한 질병이 됐다. 2006년 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에이즈 환자는 4000만명 이상이며, 이중 2500만명이 사망했다. 우리나라는 2007년 3월말 현재 4755명의 에이즈 환자가 등록돼 있고, 이 중 864명이 사망했다. 특히 ‘걸리면 끝’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에이즈가 주는 공포는 다른 어떤 질병보다 크다. 과연 인류는 ‘신이 내린 재앙’을 극복할 수 있을까?
에이즈는 한마디로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에 감염돼 면역력을 잃어버리는 질병이다. 우리 몸은 바이러스나 세균이 들어오면 이들을 퇴치하는 면역체계를 즉각 가동한다. 면역체계는 매우 다양한 면역세포, 항체, 단백질의 협주곡이라고 할 수 있어 하나라도 빠지면 문제가 생긴다. 이중 CD4 T세포(이하 CD4)라는 면역세포는 바이러스의 정보를 다른 세포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HIV는 대범하게도 바이러스를 잡는 CD4를 공격한다.
HIV에 감염되면 두통, 발열, 근육통을 3주 정도 앓다 회복된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침투한 HIV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퇴치하지는 못하며 일부 HIV는 몸에 남는다. 이때부터 HIV는 8~10년에 걸쳐 서서히 인체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면역체계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별 문제없이 생활할 수 있다. 에이즈 환자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HIV 보균자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다 갑자기 면역체계와 HIV의 팽팽했던 줄다리기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때가 온다. CD4가 혈액 1mL에 2백개 이하로 떨어지는 순간이다. HIV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며, 반대로 면역세포 수는 급격히 줄어든다. 일단 면역체계가 무너지면 평소 쉽게 퇴치했던 병균들이 우리 몸을 사정없이 유린하게 된다. 이때부터가 후천적으로 면역이 없어진 상태, 에이즈다. 일단 에이즈가 시작되면 대부분 1~2년 내에 사망한다.
어떻게 에이즈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감염을 막는 것이다. HIV는 특별한 상황에서만 전염되기 때문에 조금만 주의하면 된다. HIV 바이러스는 감염자의 정액, 질액이나 혈액에 존재한다. 따라서 성행위나 수혈을 통해서만 전염된다. 땀과 침 같은 다른 분비물에는 HIV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함께 하는 것으로는 전염되지 않는다. 모기나 다른 곤충으로 옮겨지지도 않는다. 즉 개인이 건전한 성생활을 하고, 병원이 혈액 관리를 철저하게 하면 대부분 막을 수 있다.
에이즈 치료약이 매우 빠르게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이미 HIV에 감염된 사람에게도 희망은 있다. 발견된 지 30년이 채 안된 질병임에도 에이즈는 암 만큼이나 많은 것이 알려졌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HIV가 면역세포를 파괴하는 과정을 분자생물학적으로 추적했다. 이 과정을 알아야 치료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HIV는 단백질과 RNA로 된 바이러스다. HIV는 우선 CD4에 구멍을 뚫고 자신의 RNA를 세포 속에 집어넣는다. 세포 안에 들어간 RNA는 ‘역전사효소’라는 효소를 만들어 DNA로 변신한 다음 CD4의 DNA 속에 끼어들어간다. 다음은 CD4를 이용해 수백~수천 개 HIV로 증식한다. 충분히 증식한 HIV는 CD4의 ‘자살유전자’를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이용가치가 끝난 CD4에게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CD4를 죽게 만드는 것이다.
대부분 에이즈 치료약은 RNA를 DNA로 바꾸는 ‘역전사효소’의 기능을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HIV가 CD4의 DNA에 끼어들어가는 과정을 막는 것이다. 역전사효소는 사람에게 필요 없는 효소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어 더 효과적이다. 현재 역전사효소를 억제하는 약이 약 10가지 나와 있다. 이 중 3~4가지 약을 한꺼번에 먹게 하는 ‘칵테일 요법’이 좋은 효과를 내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13개 연구팀이 1만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임상실험에서 칵테일 요법으로 치료받은 사람은 3년 내 에이즈 말기상태에 이르는 확률이 3.4%에 불과했다. 치료받지 않은 사람의 50%가 말기상태에 이르거나 숨진 것을 비교할 때 놀라운 수치다. HIV의 증식 과정이 거의 알려진 만큼, 앞으로 부작용이 더 적고 치료 효과는 더 높은 치료제가 계속 개발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현재의 치료약 개발 속도를 감안할 때 머지않은 미래에 에이즈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할 것은 에이즈는 인류가 자초한 질병이라는 사실이다. HIV의 출현 경로를 연구한 많은 과학자들은 인류가 아프리카에 조용히 숨겨진 밀림을 들쑤셨기 때문에 HIV가 세상에 나왔다고 말한다. 무분별한 개발은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다. (글 : 김정훈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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