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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이렇게 바래 버렸네…” 

오래간만에 책장 정리를 하던 A씨는 낡은 토익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대학가에 영어 열풍이 몰아치던 1996년, 하루가 멀다 하고 사들인 문제집 중 하나가 눈에 띈 것이다.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처럼 누렇게 변한 교재를 만지작거리며 A씨는 신입생 시절의 추억으로 빠져든다. 순간 그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친다. “만든 지 겨우 10년이 지난 책이 이 정도인데 고려나 조선시대의 서적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있는 거지?” 


문자를 사용하려면 그것을 ‘기록할’ 대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처음에는 파피루스, 대나무, 비단, 짐승의 뼈를 썼다. 그러나 가장 편리했던 건 역시 종이였다. 글씨가 잘 써지는 데다 운반이 쉽고 차곡차곡 쌓아 보관할 수 있었다. 현재의 노하우를 미래로 전달하는 수단인 종이는 ‘문명 발전의 기관차’가 됐다. 그런데 이 같은 종이가 현대에 들어 품질 저하의 수렁에 빠졌다. 왜 만든 지 10년 밖에 안 된 토익 책이 수백 년이 지난 조선왕조실록보다 삭아 버렸을까. 우리나라 고문서를 구성하는 한지의 특성을 짚으며 그 이유를 알아보자. 


먼저 눈에 띄는 건 한지의 견고한 섬유 구조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껍질의 섬유는 길이가 균등한 데다 서로 간의 폭도 매우 좁다. 게다가 섬유의 방향도 직각으로 교차한다. 그물 같은 구조를 띠고 있어 충격에 강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에는 한지를 여러 겹 붙여 화살을 막아내는 방탄복을 만들었을 정도다. 생활용품이던 한지가 방탄복의 재료였다는 점은 놀라운 대목이다. 


닥나무의 섬유 길이가 유난히 긴 것도 강점이다. 닥나무의 섬유 길이는 10mm 수준이지만 화학 펄프의 원료인 전나무와 소나무는 3mm, 너도밤나무와 자작나무는 1mm 밖에 안 된다. 닥나무 섬유가 나무젓가락이라면 화학 펄프의 재료가 되는 나무의 섬유는 이쑤시개인 셈이다. 얇은 철근이 들어간 콘크리트의 안정성이 취약한 것처럼 짧은 섬유를 쓴 ‘펄프 종이’는 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지가 중성을 띠는 것도 강도를 높이는 요인이다. 종이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가 산성에 상당히 취약한 반면 중성에서는 별 다른 변형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나오는 종이는 대부분 pH5 정도의 산성이다. 대부분 몇 년 지나지 않아 빛이 바래며 표면이 푸석푸석해지는 ‘산가수분해’를 일으켜 100년 뒤 아예 사라져 버릴 운명이다. 이에 비하면 한지로 만든 고문서는 ‘영생불멸’의 축복을 받은 셈이다. 


한지가 중성을 띠는 이유는 제조공정에서 산성 약품을 전혀 안 쓰기 때문이다. 원료인 닥나무 껍질을 잿물에 넣어 4~5시간 푹 삶고 나면 pH9.5 정도의 알칼리성을 띤다. 이를 고루 펴 물에 띄우는 과정에서 아욱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인 ‘닥풀’을 섞어 pH7.89의 중성으로 정확히 맞춘다는 얘기다. 화학 처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산성을 띠게 되는 현대 종이와는 태생부터 다르다. 


한지에 식물섬유를 구성하는 ‘리그닌’이라는 물질이 적당량 섞여 있는 것도 주목된다. 리그닌은 방충효과를 높이지만 섬유를 딱딱하게 만든다. 게다가 화학적으로 불안정해 수분이나 자외선과 반응, 종이를 누렇게 만들기도 한다. 전통 한지는 11월과 12월에 자른 1년생 닥나무를 쓰는 데 여기엔 리그닌이 가장 이상적인 수준으로 함유돼 있다. 이에 비해 다양한 목재를 쓰는 화학 펄프에는 리그닌 성분이 상대적으로 많아 종이 색을 누렇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처럼 한지는 화학 펄프를 재료로 한 현대 종이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품질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주위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데엔 이유가 있다. 새하얀 A4 용지보다 한지가 질 낮은 종이라는 선입견이 우선 꼽힌다. 그러나 가장 현실적인 원인은 현대식 제지공정으로 소화하기엔 한지가 사람의 손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현대 제지공정을 활용하면서도 한지의 명맥을 이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장기 보존이 필요한 공식 문서나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데 한지를 활용해 ‘수요’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신발, 그릇, 심지어 휴대용 요강에까지 한지를 광범위하게 썼다. 인사동에서만 볼 수 있는 관광 상품이 아니라 생활 속에 스며 든 한지를 기대해 볼 일이다. (글 : 이정호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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