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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혈관에 파란 잉크를 주사하면 온몸에 파란색이 퍼질까? 이런 궁금증은 이미 100년 전에도 있었고 당시 사람들은 ‘트리판 블루’라는 염색약을 혈관에 넣어 실험해 봤다. 예상대로 온몸에 파란색이 퍼졌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뇌와 척수에는 파란색이 퍼지지 않은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모든 피는 심장의 좌심실에서 나와 온몸을 돌고 다시 심장의 우심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심방의 피는 우심실을 거쳐 허파에서 가스 교환을 하고 다시 좌심방으로 들어간다. 사람에게 심장이 하나뿐이고, 피가 똑같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뇌와 척수에 파란 염색약을 막아주는 장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를 ‘혈액-뇌 장벽’(Blood-Brain-Barrier, BBB)이라고 부른다. 뇌와 척수의 관문, BBB에 대해 알아보자.
혈액이 온몸을 도는 까닭은 세포에 산소, 양분, 호르몬과 같은 물질을 공급하고, 세포반응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을 폐기할 장소로 옮겨주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해서 혈관과 세포 사이에 무슨 연결파이프가 있는 건 아니다. 모세혈관을 이루고 있는 내피세포 사이에는 작은 틈이 있어 혈관과 세포 사이에 물질이 드나든다.
뇌는 우리 몸에서 산소와 양분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기관이다. 심장에서 뿜어나온 혈액 중 20%는 곧바로 뇌로 올라갈 정도. 그런데 뇌에 있는 모세혈관에서 스며나온 혈액은 신경세포와 직접 접촉할 수 없다. 뇌에는 아교세포(glia cell)라는 세포가 매우 조밀하게 혈관을 둘러싸 혈액이 통과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이것이 BBB다.
혈액과 ‘뇌척수액’ 간의 물질교환을 제한하는 ‘혈액-뇌척수액 장벽’(Blood-CSF-Barrier)도 넓은 의미로 BBB라고 볼 수 있다. 뇌척수액이란 뇌와 척수가 잠겨 있는 투명한 액체로 뇌와 척수의 신경세포들은 뇌척수액과 직접 맞닿아 산소와 양분을 공급받는다. 전체 양은 150ml 정도로 혈액과 뇌척수액은 끊임없이 순환된다.
혈액이 뇌척수액으로, 뇌척수액이 혈액으로 바뀔 때 물질은 선택적으로 이동한다. BBB가 물질 이동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BBB을 구성하는 물질은 대부분 인지질(phospholipid)로 돼 있기 때문에 지용성 물질은 통과하나 수용성 물질은 대부분 통과하지 못한다.
그럼 수용성이면서 뇌에 꼭 필요한 물질은 어떻게 할까? 뇌에도 양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포도당과 같은 물질을 이동시키는 수단이 존재해야 한다. 뇌에는 BBB가 매우 약해서 물질이 뇌세포로 자유롭게 드나드는 부위가 있다. 대부분 뇌의 한 가운데 집중돼 있는데, 이를 ‘뇌실주위기관’(circumventricular organ)이라고 한다. 뇌는 뇌실주위기관을 통해 혈액의 성분을 검사해 필요한 물질만 선별적으로 통과시킨다. 송과선, 뇌하수체 등이 뇌실주위기관에 속한다.
뇌의 혈관 구조는 왜 이렇게 복잡할까? 뇌는 수많은 신경세포들이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루며 기억, 학습, 언어, 사고와 같은 현상을 조절하는 중추이기 때문이다. 뇌의 신경세포가 손상되면 정상 생활이 불가능해지고 질병에 걸려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혈액에서 세균이나 병원균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BBB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BBB는 완벽한 장치가 아니다. 아기는 BBB가 완성되지 않은 채로 태어나고, 높은 혈압, 저주파와 방사선 또는 감염에 의해 뇌혈관장벽이 열리기도 한다. 알코올, 니코틴 등이나 마약으로 분류하는 헤로인, 코카인 등도 BBB를 뚫고 뇌 속으로 쉽게 들어간다. 심지어 뇌염 바이러스나 광견병 바이러스도 BBB를 통과해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BBB가 오히려 생존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종양이 생기면 약물로 치료해야 하지만 뇌에 생긴 종양은 약물로 치료할 수 없다. BBB가 약물이 전달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따라서 BBB를 뚫고 뇌 속까지 약물을 전달하는 방법은 오랫동안 과학자들의 숙제였다.
지난 6월 한양대 이상경 교수와 삼천리 제약의 정경은, 김문희 연구원이 참여한 국제연구진이 BBB를 뚫고 약물을 투여하는 방법을 찾아내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들은 광견병 바이러스가 BBB를 통과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광견병 바이러스에서 BBB를 통과하는 ‘RVG 단백질’을 찾아냈다. 앞으로 이 연구결과를 응용하면 치매 등의 뇌질환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MRI 촬영을 위해 사용하는 조영제도 BBB를 통과하지 못해 뇌 조직을 영상화하기 힘들었는데 이 문제도 해결됐다. 지난 5월 서울대 현택환 교수팀과 성균관대 이정희 교수팀은 공동으로 BBB를 뚫고 뇌 속까지 들어가는 ‘산화망간 나노입자를 활용한 MRI 조영제’를 개발해 국제화학저널인 ‘안게반드케 헤미’에 발표했다. 새 조영제는 단기적으로는 뇌연구 분야에 획기적인 연구방법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한 면역체계가 알레르기라는 부작용을 낳듯이, 우리 뇌를 지키기 위한 BBB도 때로는 치료를 방해하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BBB에 대한 이해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뇌질환을 정복하기 위해 창의적인 시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연구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글 : 이정모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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