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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란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참’나무라면 ‘진짜’나무라는 뜻인데 과연 어떤 나무가 진짜 나무일까. 그런데 식물도감에는 ‘참나무’란 이름이 없다. 대신 ‘참나무속’라는 이름이 나오고 여기에 신갈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가 있을 뿐이다. 이들을 통칭해 참나무라 일컫는 이유는 서로가 유전적으로 가까워 서로 다른 나무끼리 쉽게 인연이 맺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신갈나무와 떡갈나무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면 떡신갈나무로 불린다.
상수리나무가 참나무속 나무와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상수리나무의 원래 이름은 ‘토리’였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간 선조는 제대로 먹을 음식이 없자 토리나무의 열매인 토리로 만든 묵을 먹었다. 묵 맛에 빠진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 궁에 돌아온 뒤에도 토리로 만든 묵(도토리묵)을 즐겨 찾았다. 그래서 상시 수라상에 오르게 돼 ‘상수라’가 됐다가 ‘상수리’로 불리게 됐다. 도토리는 떡갈나무의 열매를 가리키는 단어였지만 오늘날 도토리는 참나무속 나무의 열매를 통칭하는 표현이 됐다.
가을철 산에 오르다보면 재미 삼아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자루를 들고 나선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참나무는 해마다 많은 양의 도토리를 만들어 낸다. 얼마나 많은가 하면 풍년인 해는 성숙한 참나무 한 그루에서 1만개가 넘는 도토리를 만들고 흉년인 해에도 최소 300~400개의 도토리를 만든다. 참나무는 왜 이렇게 많은 양의 열매를 만드는 것일까?
식물은 종족 보존을 위해 꽃이나 열매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키가 낮은 야생화는 꽃을 만드는 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이들은 4월 중순이 되기 전까지 암꽃에 꽃가루가 날아와 수분에 성공해야 다음해 자손을 기약할 수 있다. 5월이 넘어 나뭇잎이 무성해지면 그늘에 가려 아무리 화려한 꽃을 피워도 ‘중매쟁이’ 벌과 나비가 찾아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나무는 씨앗을 품고 있는 열매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대부분 나무에는 새가 살기 때문에 벌과 나비가 찾아와도 새에게 잡아먹히기 십상이다. 게다가 예쁜 꽃을 만들어낸들 숲 속 그늘에 묻혀 보이지 않을 게 뻔하다. 따라서 나무는 근친교배의 약점을 감수하고서라도 바람을 중매쟁이로 택했다.
나무는 꽃에 공을 덜 들이는 대신 열매를 만들어 산짐승이 씨앗을 퍼뜨리는 전략을 택했다. 산짐승이 열매를 먹고 먼 곳에서 똥을 싸면 소화가 안 되는 씨앗은 그대로 토양에 떨어진다. 힘 안들이고 먼 곳까지 자손을 전파할 수 있는 셈이다. 참나무가 선택한 산짐승은 다람쥐나 청설모다.
참나무가 만드는 도토리는 몸집이 통실해 바람을 타지도 못하고 나무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러나 도토리를 주로 먹는 다람쥐나 청설모는 도토리를 입에 물고 좁게는 수십m에서 수km까지 이동할 수 있고, 참나무가 자라는 곳보다 더 높은 고지대에도 간다. 이어 겨울철 식량을 저축하기 위해 도토리를 땅속에 묻는다. 그런데 다람쥐와 청설모는 머리가 나빠 자신이 어디에 도토리를 묻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다람쥐나 청설모는 땅에 묻은 도토리의 95% 이상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한다. 결국 땅에 묻힌 도토리는 싹을 틔운다.
이와 달리 쓰러진 나무나 바위, 낙엽 위로 떨어진 도토리들은 착지를 잘못한 탓에 싹을 틔울 수 없다. 여기서 뿌리를 내린다 해도 지탱하고 자랄 흙이 없는 까닭이다. 또 땅에 묻혔다고 싹을 틔우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도토리는 멧돼지와 곰 같은 대형 포유류와 바구미, 거위벌레 같은 곤충의 일용할 양식으로 쓰인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싹을 틔우는 참나무 개체는 약 10%. 물론 이들이 모두 성숙한 나무로 자란다는 보장은 없다. 봄철 어린 새싹을 뜯어먹는 초식동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고, 여러 해 동안 산불의 피해로부터도 살아남아야 한다. 모든 시련을 딛고 구사일생 살아남아야 높이 솟은 나무가 될 수 있다.
비록 처음 뿌려진 도토리에 비해 살아남는 비율은 낮지만 워낙 어마어마한 양의 도토리를 만들기 때문에 참나무는 숲의 주인공이 된다. 소설에 기승전결의 스토리가 있듯 숲에도 ‘천이’라는 개념이 있다. 태양이 작열하는 황무지에는 볼품없는 풀이 생명을 싹틔우고 열악한 환경에도 잘 견디는 침엽수가 뿌리를 내린다. 침엽수가 무성한 숲을 이루면 비로소 나무 그늘아래 보호를 받으며 자랄 수 있는 참나무와 단풍나무 같은 활엽수가 자란다. 제주도와 남부 해안지역을 제외한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은 숲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참나무가 숲의 주인공이 된다.
게다가 참나무가 숲속 동물에게 퍼주듯이 베푸는 이런 행동은 생태계를 지키는 풍요로운 자산이 된다. 참나무 숲이 전나무와 잣나무 같은 침엽수 숲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가 어울려 산다는 연구결과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최고조에 이른 숲은 산불이나 벌목, 도로건설 같은 인위적인 교란만이 없다면 종 다양성이 가장 높은 상태를 유지한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좋은 것’을 일컬어 ‘참’이란 단어를 붙이고 ‘나쁜 것’을 일컬어 ‘개’라는 단어를 붙였다. 가령 전라도에선 먹을 수 있는 꽃인 진달래를 ‘참꽃’이라 부르고 독이 있어 못 먹는 철쭉을 ‘개꽃’이라고 불렀다. 참나무의 학명인 ‘퀘르쿠스’(Quercus)도 라틴어로 ‘진짜’, ‘참’이란 뜻이니 동?서양의 마음이 통했나 보다.
인류는 참나무로부터 목재와 땔감, 버섯, 도토리 등 여러 가지를 얻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참나무에게 무엇인가 베풀어야 할 때가 됐다. 우리 숲이 훌륭한 모습을 갖추도록 참나무를 제대로 가꾸지는 못하더라도, 가을철 얼마간의 도토리를 남기는 여유는 지녀야 할 것이다. 숲에 아낌없는 양분을 주는 참나무를 보노라면 문득 “강물이 바다로 되돌아가듯, 베풀어진 물건은 준 자에게 되돌아간다”는 중국 속담이 떠오른다.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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