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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구려의 하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록을 남긴 조상들 덕택에 1천5백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 자리잡은, 천상열차분야지도(天像列次分野之圖)란 긴 이름을 갖고 있는 천문도(국보 제228호)가 바로 그것이다. 풀어 설명해보면 천상은 하늘의 형체이며 열차는 황도(黃道) 부근을 12지역으로 나눈다는 의미이고 분야는 이에 대응하는 지상의 지역이다. 한마디로 하늘의 모양을 차라는 단위로 구분해 놓은 그림이라는 뜻이다. 




가로 122.8cm, 세로 200.9cm의 크기로 두께 11.8cm의 검은 대리석(흑요석)에 새겨진 이 천문도에는 당시 한반도에서 관측할 수 있는 1,467개의 별(별자리로는 283개)이 표시되어 있다. 남극 주위의 별들을 제외하고, 당시 우리 조상들이 관측할 수 있었던 하늘의 모든 별자리가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천문도는 조선 건국 3년 후, 즉 1395년(태조 4년)에 권근 등 11명의 학자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과학적인 천문도로는 중국의 ‘순우천문도’(1247년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천문도가 고구려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흥미로운 것은 제작 경위에 대한 설명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여백에 “이 천문도 석각본이 오래 전에 평양성에 있었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대동강에 빠뜨려 버린 지 세월이 오래되어 그 탁본조차 없어져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전하(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지 얼마 안 되어 탁본 하나를 바치는 자가 있어 이를 매우 귀하게 여겨 관상감으로 하여금 천문도를 돌에 새기도록 명하였다.”고 적혀 있는 것이다. 당시 수도였던 한양에서 관측이 아니라 평양의 천문도를 기본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고구려의 하늘임을 보여주는 몇 가지 정황들이 있다. 


우선 시기적으로 볼 때 황도 별자리의 한자 표기가 당나라 이전의 표기라는 점이 눈에 띈다. 또 중국의 천문도에는 없는 별자리가 독자적으로 들어 있고 중국에서는 그다지 소중히 여겨지지 않은 별들이 잘 드러난 점으로 보면, 우리 조상들이 직접 관측한 내용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천문도에 나타난 별들의 위치가 북위 39도를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통상 각 나라의 천문도는 수도를 기준으로 만들어 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북위 39도는 옛 고구려의 주요 도시였던 평양에 근접한 위도이다. 참고로 중국에서도 이 위도에 위치한 고도는 베이징 정도인데, 베이징이 통일 왕조의 수도가 된 것은 명나라 이후이다 




사실 사람들이 해와 달 그리고 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인데, 이러한 기록들은 고인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와 백제 역시 천문에 관심을 가졌던 기록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천문관련 흔적에서는 고분벽화를 많이 남긴 고구려가 단연 돋보인다. 고구려시대 19개 고분에는 해와 달ㆍ북두칠성 뿐만 아니라 남두육성ㆍ북극 3성ㆍ5행성ㆍ28수 등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 28수는 달이 매일 밤 일정한 시각에 차지하는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해와 달이 지나가는 부근에 널려있는 별들을 28 개의 덩어리로 묶어서 이름 붙인 별자리이다. 




하늘에 흩어져 있는 별을 별자리로 구분하는 방법은 동서양이 달랐다. 


서양에서는 수 천 년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등 바빌론 지역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동들이 태양과 행성이 지나는 길목인 황도(黃道)를 따라, 양 ·황소 ·쌍둥이 ·게 ·사자 ·처녀 ·천칭 ·전갈 ·궁수 ·염소 ·물병 ·물고기 자리 등 12개의 별자리(황도 12궁)로 구분한 것을 기원으로 꼽고 있다. 반면 중국에서는 BC 5세기경 적도를 12등분하여 12차(次)라 하였고, 적도 부근 별들을 28개의 별자리로 구분한 뒤 28수(二十八宿)라고 불렀다. 




고구려 역시 중국의 별자리 분류에 따라 관측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 기록이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남아 있는 셈이다. 역사시간에 배운 강서대묘 고분 벽화인 사신도의 청룡ㆍ주작ㆍ백호ㆍ현무 등도 각 방위 별자리 모양에서 비롯됐다. 즉 동방에 각ㆍ항ㆍ저ㆍ방ㆍ심ㆍ미ㆍ기 등 7 개 별자리를 비롯해, 28수를 네 개의 방위별로 7 개씩 구분했던 것이다. 이러한 동양의 별자리 분류는 AD 3세기경이 되면 283궁으로 늘어난다. 




참고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별자리는 서양에 비해 적은 수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서양의 큰곰자리는 고구려에서 북두칠성(등에서 꼬리), 삼태성(발 부분)으로 분리해 그렸고, 거문고 자리도 직녀와 잠대로 구분해 보았다. 서양의 오리온 자리의 경우 삼수(머리)와 자수(몸통), 벌(구슬띠), 삼기(가죽방패) 등 4부분으로 구분해 별도의 별자리로 보기도 했다. 같은 하늘이라도 동서양에서 보는 모양이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가 새로이 개창 된 지 불과 4년 만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했을까? 


우연히 발견된 고구려 천문도를 복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조선으로서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모범적인 정치를 펴 나갈 것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고조선과 고구려의 유지를 이어받아 북쪽으로 적극 진출하겠다는 뜻을 은연 중에 나타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천문에 대한 이러한 연구와 관심은 백성들의 경제생활과 과학기술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농사와 직결되는 기후의 예견이나 농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달력을 정확하게 제작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천문관측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와 달 그리고 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그 시대의 과학적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태조 4년, 1395년에 처음 제작된 이후 조선시대 동안 줄곧 천문역법의 표준 역할을 했다. 성도에 그려 넣은 별자리 그림은 그것 자체로 천구 상에서의 별자리의 표준적 위치를 보여줬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성도(星圖) 주위의 여백에는 기준 별자리 역할을 한 28수의 거극도와 24절기 마다의 해 뜨고 지는 시간에 천구 자오선을 지나는 별자리 이름 등이 적혀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역법과 시간 계산의 기준이 됐고, 무엇보다 상시적으로 별을 관측해야 하는 천문관원들에게는 교과서가 됐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나라(奈良)현 아스카무라(明日香村)의 기토라 고분에서 7세기 말∼8세기 초 것으로 추정되는 천문도가 발견됐는데, 그 관찰 위치가 일본의 고대 수도인 교토나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고구려의 고분에 있는 별자리와 비슷하며, 우리나라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많은 유사점이 있다. 어찌된 것일까? (글 : 유상연 ?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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